(연재)아버지의 일기(63~73일차)
(연재)아버지의 일기(63~73일차)
  • 김소정
  • 승인 2017.10.17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의 일기 63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2일(三月十二日) 월(月) 맑음
오늘부터 창원 군도 같이 우리 자취생활自炊生活에 들어오다.
밤에는 김학원金學元85 군이 자다.
천봉산 등을 지고 갑장산 앞에 두니 모든 산줄기 상주읍尙州邑을 옹호하며 푸른 앞 냇가 물은 조금도 변變함 없이 흐르고 있다.
쳐다보니 천봉산 산줄기에 온화溫和하게 자리잡은 침천정枕泉亭은 뒤뜰이 만고萬古 사시四時에, 그 푸른 절기 변함 없이 자랑하는 죽竹으로 둘러싸여 미묘한 건축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오늘도 사범과師範科 남녀학생南女學生은 웃음에 가득한 얼굴로 등교하였다.
연然이나 나에게는 조금이라도 기쁜 마음 없이 선생님의 교수敎授를 받았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아버지의 일기 64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3일(三月十三日) 화(火) 맑음
사방四方은 아직 어둠 속에 잠기어 다만 도로道路에는 보급품補級品을 실은 자동차自動車가, 앞 헤드라이트에 불을 켜 쏜살같이 달리어 일선一線 장병님께 보급補級하고 있다.
날은 새다.
고요히 잠든 이 인간세人間世는 벌써 복잡複雜한 오늘을 형성形成하기 위하여 이쪽, 저쪽 마을에는 아침 연기 잠뿍하여졌다.
아침 일찍이 등교하였다. 아무도 없고 내가 제일 먼저 왔다. 곧 Piano를 열어 음정音程연습을 하였다. 교실敎室은 매우 차다.
모두들 추움을 무릅쓰고 교수敎授받고 있는 이 상태狀態 내가 전에 원願하던 학생시절學生時節, 그립던 그 학창시절學窓時節, 그 어느 때를 물끄러미 생각났을 때 미숙未熟한 이 자者는 영원永遠히 이 학생學生 시절을 계속하고 싶었다.
속계俗界의 세상世上은 모순矛盾의 세상世上!


아버지의 일기 65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4일(三月十四日) 수(水) 맑음
오늘은 내가 식사食事할 당번當番이었다.
일찍이 일어나 일기日記를 쓰다.
반찬 없는 아침 조반朝飯이나 매우 맛이 좋았다.
어제 해은海恩 형의 실업학습장實業學習帳을 꾸어가지고 왔으나 없기에 이상異常하여 곧 물어볼 예정豫定으로 일찍이 등교하였다.
1951년 3월 12일 전황戰況, 지상전투 상황
서부전선西部戰線 미군 25사단師團 5리 전진前進
중부전선中部戰線 미군 1사단師團 10리 전진前進
동부전선東部戰線 11,400명 살해殺害
교장校長 선생님의 강의講義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나며 많은 감득感得을 주었다.
참으로 교장校長 선생님의 교수敎授받은 대로 틀림없이 가르친다면 옳은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敎育을 할 수 있으며, 교육자敎育者로서는 완전完全한 임무任務를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녁에는 김정현金廷顯 형이 와서 자다.


아버지의 일기 66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5일(三月十五日) 목(木) 맑음
아직 아무도 등교하지 않았다.
나는 못으로 Piano를 열어 음정音程 연습하던 중, 김용식金龍植에게 자리를 주고 우리는 뒤 잔디밭에 가서 준희, 춘매와 같이 장난치고 놀았다.
수학數學시간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수학의 원리原理를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웠다.
과연 어렵고 어려우며 또한 대부분大部分 수학數學에는 취미가 없고 어려운 모양이었다.
오늘은 사회생활社會生活 1시간 마치고 본교本校로 등교하여 교장校長 선생님의 훈화訓話 말씀을 듣고 곧 집으로….‘징병신체검사徵兵身體檢査’ 통지서通知書를 가지러 왔다.
아버지께서는 전일前日 며칠간 편찮으시었다.


아버지의 일기 67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6일(三月十六日) 금(金) 맑음
상주尙州 만산蔓山, 자취생활自炊生活의 그 어느 날 뒷도랑 섶에서….
새벽에 잠을 깨다.
아버지의 뼈아픈 소리 뼈아팠다.
벌써 부엌에는 고모님께서 새벽밥 지어 주시기에 분주하시었다.
연然이나 밥 지어 주는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가슴을 애태우는 것이다.
과연 자기自己의 아들딸이 아니면 아무 소용所用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동시同時에 감개무량하였다.
오늘은 또한 징병신체徵兵身體 검사일檢査日이다.
권영경權榮經 형과 같이 동행同行하였다.
벌써 앞에 가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장소場所는 중앙국민학교中央國民學校, 수많은 대한大韓의 우리 동지同志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김정현 형과 곧 검사실檢査室에 들어가 열烈로 서다. 물론勿論, 건강한 청년도 있는 동시同時에 반면反面에 나와 같이 몸이 쇠약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여러 검사실檢査室을 거쳐서 이제는 판정실判定室이다.
사람을 종별種別로 나누는 엄숙한 판정실判定室이다.
모두들 서로 자기自己 신체身體의 판정判定을 기다리기에 초초焦憔87한 마음으로 열烈로 서있다.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반드시 이번에는 갑종甲種이라는 신념信念 아래 판정관判定官 앞에 갔다.
연然이나 이상異常하였다.
불합격不合格이라는 세 글자로 여러 동지同志들에게 부끄러운 반면反面에 내 일신一身에는 좀 안심安心을 주었다.
검사檢査를 마친 후, 학교學校로 갔다.
막 4시간時間이 시작始作되었다.


아버지의 일기 68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7일(三月十七日) 토(土)흐림, 맑음
곧 등교하였다.
아무도 없어 낙서만 하였다.
도중途中 동지들은 모여서 수업을 시작始作하였다.
지리地理시간이다.
지리地理 선생님은 별別로 교육계敎育界에 경험이 적은 것인즉, 아직도 교수법이 분간分揀하기 어려우신 모습이었다.
오늘은 음악 2시간 하고 본교本校로 모여서 몸 검사를 하고 교장校長 선생님의 훈화訓話 말씀을 들었다.
찬밥 두 술을 먹은 뒤, 우리는 후천교에서 자동차自動車를 타려고 하다 비로소 처음 Mp88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기다리던 중, 선생님들은 멀리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모양이시기에 도보徒步로 창원, 병룡, 상수와 함께 먼지투성이 도로道路가를 걸어 해님과 함께 동행同行하여 구슬픈 고향故鄕에 왔다.


아버지의 일기 69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8일(三月十八日) 일(日) 맑음
토요일 밤이다.
나는 병희 형님 댁에 가서 놀다.
조금 후, 태경이와 ‘영달’ 옆방에서 꽃장난 하던 중, 조금 기분氣分 나쁜 일로 서로 싸웠다.
참으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행동行動을 하였다.
일一 국민학교國民學校 아동兒童과 서로 마을이 고요히 잠든 동네를 시끄럽게 하였다.
조금 싸운 후, 번듯 생각하였다. 나의 집이 없다고 보는 것 같고 나를 무시無視하는 것 같아 어디 한번 보자 하고 생각하였다.
일요일 아침이다.
10시경에 면面에 양정楊亭밭, 이토移土89 신청관계로 갔다가 용지가 없어 그만 돌아와서 중식을 먹고 박병룡 군과 짐을 지고 또다시 상주尙州 하숙집으로 왔다.
도중途中에 병철, 시태90와 함께 동행同行하였다.
도착到着한즉, 벌써 해는 졌다.

아버지의 일기 70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19일(三月十九日) 월(月) 맑음
눈을 뜨자 밖은 다 환히 새었다.
벌떡 일어나 아침을 하였다.
따뜻한 날씨가 오늘 아침은 얼음이 얼고 매우 찬 날이다.
식사당번食事當番이기에 모든 식사食事일을 맡아 오늘은 해야 할 것으로 일찍이 아침밥을 하였다.
막 식사 중食事中, 정필, 창원 군이 왔다.
오늘 아침 조회朝會는 본교本校에서 행行하였다.
교장校長 선생님의 훈화訓話말씀.
1. 통화通貨수축
2. 식량食糧절약
3. 통로通路금지
4. 복장服裝단정
매우 참고될 만한 교장校長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또한, 등교 시時에 김대경이와 대경 모당母堂91이 오시어 전학轉學 문제
에 관하여 왔기로, 나는 임林 선생님에게 부탁한 후 분교分校로 갔다.
증이파의甑以破矣이요
시지하익視之何益이라


아버지의 일기 71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20일(三月二十日) 화(火) 맑음
닭소리에 잠을 깨니 밖은 어두침침하여 아직 먼동이 트지 않다.
줄곧 일어나 어젯밤에 작성作成하다 만, 장병將兵 위문문慰問文의 원고原稿를 마치기 위해 다시금 쓰기 시작하였다.
별안간에 쓰고 보니 아무 두서頭書 없는 글이 되어 선생님에게 부끄러운 감感이 들었다.
아직도 침천정枕泉亭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 역시 날은 차다.
차차 친구들은 모여 첫 시간에 심리心理를 하였다.
하교 시下校時에는 최춘매崔春梅의 생물生物 학습장學習帳을 꾸어오다.
밤에는 김정현, 안종욱安鐘昱이 와서 자다.
몸이 괴로워 곧 학습學習정리 마치고 잠을 잤다.
조선朝鮮 교육사敎育史 책 꾸다.


아버지의 일기 72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21일(三月二十一日) 수(水) 맑음
본교本校에서 조회朝會를 마치고 분교分校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여학생女學生 몇이 와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차다.
뚫어진 문구멍으로 창문 없는 훤한 곳으로 바람이 우리의 떨음을 만들고 있다.
오늘은 춘분일春分日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은 날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날을 발견發見하여 우리에게 편리便利한 점이 되었을까? 수업 중授業中에 몇 명의 학생學生이 와서 밖에서 돌아다니었다.
5, 6시간은 미술美術시간이었다.
미술美術 선생님의 지도指導야말로 참으로 우리에게 미적美的 감득感得을 얻지 못할 수업授業 지도이시었다.
밤이다.
나는 귀운 형, 김창원 또한 제弟93와 함께 안너출이에 놀러가서 ‘묵’을 사 먹으러 갔다.
불행不幸하게도 없어 할 수 없이 술 한 잔씩 나눠먹고 내려왔다.
인간人間은 언제든지 지덕知德이 있어야 한다.
(점잖은 태도態度)로!


아버지의 일기 73
1951년(檀紀四二八四年)3월22일(三月二十二日)목(木)흐림,맑음
동생들의 곤하게 자는 소리와 함께 막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구름이 끼었고 또 ‘눈’이 가끔 가다가 뿌려 오늘의 일기日氣를 매우 흐리게 할 날씨다.
벌써 일어난 한 농부農夫 아침 추움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밭을 갈고 있었다.
연然이나 도저히 이렇게 자취생활自炊生活을 계속한다면 영양부족營養不足으로 나의 쇠약한 몸이 더욱더 쇠약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가끔 ‘포’ 소리 어디서인지 들리어 농촌인農村人으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 하여 준다.
첫 시간에 생물生物을 마치고 둘째 시간에 심리心理를 하였다.
좀 더 복습하고 독서를 많이 계속하면 심리학心理學이라는 교재敎材도 매우 흥미興味있는 것이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담임擔任 선생님의 공납금公納金에 대對하여 말씀하시었다.

(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