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아버지의 일기(42~44일차)
(연재)아버지의 일기(42~44일차)
  • 김소정
  • 승인 2017.09.27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의 일기 (42)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19일(二月十九日) 월(月) 흐림
오늘도 면민 전체面民全體에게 공검학교恭儉學校에서 예방주사豫防注射를 놓았다.
아침 일찍부터 그저 사람들이 노인, 젊은이, 새빨간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어제 눈이 와서 운동장과 길가가 온통 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걷기에 매우 불편不便스러웠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자기自己가 먼저 마치기 위하여 아우성치는 것이다.
이맹희李孟熙 또 2인 와서 놀다.
우리는 놀다가 늦게 가서 맞다.
그리고 곧 마치어 우리 친우親友 10인은 양정楊亭 권영직 집에 가서 중식을 먹고 다른 동무들은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다. 내일은 정월正月 대大보름 날이다.
* 조선 선조宣祖 때의 학자 토정土亭 이지함의 도참서圖讖書.

아버지의 일기 (43)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20일(二月二十日) 화(火) 흐림
오늘은 정월正月 대보름이다.
집집마다 새벽 등불을 켜서 ‘찰밥’을 하기에 부인婦人네들은 분주한 것이다.
나는 권영연 집에서 자고 곧 집으로 오다.
쓸쓸한 기분氣分 참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하시던 말씀이 지금에서야 비로소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는 부엌에 불 하나 없고, 조금도 보름이란 기색氣色은 어느 한구석에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을 만큼 나는 불쾌不快한 마음 금禁하지 못하였다.
물론勿論, 아버지 역시 그러한 마음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윽이 작년昨年의 대보름날을 생각하여 보았다.
작년昨年에는 ‘어머니’가 지어주신 맛있는 찰밥으로 기쁨의 보름날을 맞이하였건만, 오늘은 이다지도 나의 마음을 구슬프고 슬프게 하여 주는 것인가?
석양夕陽이다.
이쪽 저쪽 산마루에는 달맞이 하려고 횃불을 켜들고 초조한 마음으로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막론莫論하고 달뜨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달은 구름에 싸여 그저 불그레한 모습만 나타내고 있다.
서산西山에는 전前보다 유달리 붉은 노을이 되어있다.


아버지의 일기 (44)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21일(二月二十一日) 수(水) 흐림
어젯밤인 중 알았던 것이 벌써 아침 조반朝飯이다.
참 빠르다.
참으로 꿈이다.
매일 유다른 일 하는 것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먹고 자고 무정無情 한 세월歲月, 낙樂 없는 세상世上, 앞으로 독서讀書로써 모든 비애悲哀를 없애려고 온갖 수단으로 하여 보았으나 가정환경家庭環境이 도저히 독 서할 동기動機를 주지 않는다. 예주 할머니 한 분 오시어 우리 집 면綿을 꼬치로 말아 주시다.
아마 아버지께서는 *솜을 타래로 주었던 것이었다.
오늘도 심심하여 방위본부防衛本部, 학교學校로 돌아다니다. 게으른 생각에 나는 좀 더 독서할 만한 서재書齋가 있다면,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공부하여 보겠다는 마음이 하루 몇 번씩 우러나오는지 모르겠다.
두어라. 이것도 한갓 나의 일생一生에 많은 자극刺戟을 줄 것이다.
* 솜덩어리.

(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