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허정연 기자
29편, 험블리 세계 여행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작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늦게 든 잠에 깬 시간은 이미 오후가 다 되어 간다.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한 후 네바강을 걸으며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화창한 오후, 멋진 박물관 건물 보다 더 눈에 띄는 맞은편 정원에 가꿔진 빨간 튤립 꽃밭과 그 뒤로 보이는 강의 조화가 너무도 예뻐 박물관은 뒤로 하고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변을 이리 저리 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다 문득 뒤를 돌아 보니 꽃들에 푹 빠져 행복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엄봉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꽃을 좋아하는 걸로 밝혀 진 엄봉이와 함께 한참을 꽃밭에서 서성이다 바라본 네바강 맞은편으로 보이는 길고 뾰족한 건물이 인상적이다. 토끼 섬(Hare’s Island)이라 불리기도 하는 자야치 섬((Zayachy Island) 에 위치해 있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 이다.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 에 의해 완성 된 이 요새는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을 치르면서 스웨덴군의 침입을 막고자 사람이 잘 살지 않는 습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1720년대부터 수비대의 주둔지와 귀족 및 정치범의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의 황제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무엇 보다도 바로 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우기 위한 발판이었기에 이도시로서는 더욱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요새가 있는 자야치 섬(Zayachy Island)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가니 웬 커다란 옛날 배가 보인다. 멋스럽게 서 있는 모습에 혹시 박물관 같은 유적인가 하고 다가가 보았지만 오래 된 배를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이었다. 저 곳에서 식사 하면 너무나 로맨틱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며 이 곳을 지나쳐 갔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더 좋은 곳에서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면서…
우리는 요새의 외부 모습을 보기 위해 건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요새 위로 올라 네바강을 바라보는 경치도 멋있을 것 같다. 요새의 내부에 있는 각종 무기들은 이곳을 철저히 지키려 했던 의지가 더욱 돋보이는 듯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 중 하나인 이 요새 밖은 이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인 네바 강변으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곳에서의 여유와 오랜만에 비추는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을 맞으며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너무도 평온해짐을 느낀다. 이 곳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평화로운 강변에서의 시간을 보낸 우리는 이곳을 뒤로 하고 전날 눈 여겨 봐 두었던 달달한 삐쉬키를 먹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러시아 국민 간식으로 불리는 삐쉬키(пышки)는 쫀득한 도우를 튀겨 부드러운 슈가파우더를 듬뿍 올린 러시아식 도넛이다. 우리의 도넛과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이 곳에서 갓 튀겨 나온, 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간식에 행복해진다.
달콤한 삐쉬키로 기력을 충전한 우리는 숙소를 향해 넵스키 거리를 걷고 또 걸어 갔다.. 교통비 절약이라는 이점도 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천천히 걸으면서 구석구석 더 보고 싶은 곳이기에 이 곳을 걷고 있는 순간에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어느덧 너무도 평화롭게 느껴졌던 오후가 지나 저녁이 다가 오지만 하늘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다. 오늘도 이곳의 백야를 즐기기 위해 숙소에서 휴식하며 얼른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기분 좋았던 오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새겨 본다.